나성생각

1.
기록물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겠다는 결정, 퍼포먼스라는 형식은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말하고 싶다’ 라는 작업의 동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 자리, 그 시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시적으로 말하고, 그 말들이 흩어지기를 바랐다. 모든 말이 낱낱이 들리거나 이해되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기에 여러 차례 반복하여 보거나 부분적으로 멈추어서 볼 수 있는 기록영상의 형식은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았다. (*기록영상에 대해 스스로 세워둔 결정은 이후 전시라는 틀에서 작업을 보인다는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몇 차례 바뀌게 되었다.)

낮은 높이의 가림막 뒤에서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그것이 라이브 스트리밍되는 점:
가림막은 사람이 서있을 때에 일반적으로 무릎 살짝 위에서 허벅지 정도까지 오는 높이이기 때문에, 가림막 안쪽에 서 일어나는 일은 상당히 쉽게 관찰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림막의 존재와 가림막 외부로 퍼포먼스가 라이브 스트리밍 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고자 하지만 완전히 노출되고 싶지는 않다는 결정과 말을 하기 위한 나만의 스페이스를 확보해야 했던 필요 때문이었다.

2.
오브제들은 특정한 사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브제가 말과 움직임과 만나는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연상될 가능성 은 내포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자꾸만 뒤바뀌는 일이다. <나성>에서는 주로 몸이 오브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오브제들이 몸의 반경과 움직임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몸과 오브제는 주객이 없다.

3.
‘아버지와 딸’이라는 혈연의 관계이지만 13년 간 만나지 않았던 낯선 사이; 미국에 줄곧 살고 있지만 “사우쓰코리아” 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여전히 영어는 많이 서툰 아버지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영어로 말하는 것이 불편 하지 않은 딸; 딸은 “손이 많이 컸”고 성인이 되어 처음 만났기에 “술은 할 줄 알아?”라고 묻는 사이지만 기억속에 남은 익숙함(“아직도 돌을 모으네”)을 가지고 있는 사이

4.
<나성>의 무대는 서울과 LA라는 도시의 풍경을 생각하는 동시에, 어떤 형과 질감, 색, 무게, 표면을 가진 나무가 또 다른 나무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며 만들어졌다. 그것은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언어 자체가 품고 있는 그 언어의 모양과 각기 다른 모양의 언어가 조합되었을 때의 느낌, 말을 길게 늘리고 속삭이고 딱딱 끊어 말하고 말과 말 사이의 간격, 말이 서로 겹쳐지고 붙고,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에 의해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 정서에 대해 고민하며 퍼포먼스의 말이 결정되었다.

<나성>에서의 한국어와 영어의 뒤섞임은 ‘아버지’와 ‘딸’의 장소적, 언어적 간극을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국어가 모국어인 관객을 기준으로 조금 더 숨기고 싶은 말과 또박또박 알아 들었으면 하는 말에 따라 언어가 선택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두 언어를 한 문장 내에서 뒤섞어 사용하는 것은 나에게 ‘언어의 모양’을 의식한 일이기도 했으나 미국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아주 일상적인 말하기의 방식이었다.

5.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이고,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인 존재. 한인타운의 (한국과의) 유사성과 묘한 차이. 끊임없이 무대 주변을 맴도는 상태로 보여지는 퍼포먼스, 이것인듯하지만 확실히 이것은 아닌 오브제의 상태. 두 개의 말을 전부 할 수 없으면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말들, 두 개의 말을 전부 하더라도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말들. 정확하게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곳에 있기를 선택하는 것. 정확하게 애매하기.

노혜리
20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