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투에서 연극으로
우아름
노혜리의 포트폴리오에는 현재 진행 중인 <나성> 시리즈를 기점으로 변환과 확장의 과정에 있는 퍼포먼스가 담겨 있었다. <나성LA-sung>(2016)을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이 시리즈를 전후로 하여 작가가 제작하는 오브제의 성격과, 작가가 오브제를 다루거나 그들의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가 퍼포머로서 제 몸을 사용하거나 극을 개진해 나가는 방법 또한 좀 더 독자적인 방법을 구축한 듯하다.
<나성> 시리즈 이전의 퍼포먼스들을 잠시 일별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 바이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브제>(2015),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브제 드로잉>(2015)이나 <천장 만나기>(2013), <잠자>(2015) 등 이전의 퍼포먼스에서는 사물의 상태나 형태가 퍼포먼스의 주를 이루었다. 사물 그 자체의 논리로 움직이는 사물의 세계에 퍼포머 또한 하나의 사물의 논리로 편입하여, 자신의 신체를 사물과 길항관계를 이루는 데 사용한다. 퍼포머는 사물의 조직이나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들을 세우거나 유지시키려 애를 쓰지만, 사물의 상태-뒤얽힘, 꼬임, 무너짐-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구조에 휘말리기도 하는 등 난처함에 처한 채로 퍼포먼스가 마무리되기도 한다. 실패하기로 예정된 분투처럼, 퍼포머는 물성과 중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물의 세계에서 버티기, 뻗치기, 몸부림치기 등과 같은 끈기와 인내의 몸짓을 펼치고 있다.
자신을 사물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그리고 사물을 스스로의 논리를 지니는 주체로 격상시키는 작가의 의도는 작업을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브제 드로잉> 설명에서, “등장하는 몸은 얇고 긴 재료로 만들어진 오브제를 삼각 프레임의 형태로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사각 프레임의 주위를 맴돈다. 삼각과 사각 두 개의 프레임의 조건에 대응하며 몸의 형태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등장하는 몸”이나 “~에 대응하며 몸의 형태가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에서 퍼포머인 자신의 등장과 몸짓에 대해 수동태의 문장으로 서술함으로써 제 자신의 의지보다는 사물의 의지에 따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장 만나기>에서도 “몸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천장이라는 면과 만난다”고 서술하는데, 여기에서 약속이란 작가의 의도 너머에서 어떤 절대항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이지,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브제>에서 퍼포머의 신체는 문이라는 사각 프레임 속에서 가능한 형태를 순차적으로 취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피상적인 서술ㅡ“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손과 발의 포지션은 순차적으로 뒤바뀌지만 순서의 의미를 밝혀내기는 어렵다. 몸은 다만 각각의 포지션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하는 형태를 만든다”ㅡ은 자신의 신체를 차라리 오브제로 다루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나성>시리즈와는 언뜻 이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이후의 작업에서는 무대공간에서 오브제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면서 자전적인 이야기에 토대를 둔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데, 스토리텔링이나 오브제를 다루는 작의는 이전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두 번의 <잠자> 퍼포먼스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잠자>(2015)는 이전 작업의 맥락에서 진행된다. 누워있는 작가와 작가의 몸 위를 덮고 있는 비정형의 오브제가 펼치는 난투극이다. 작가는 오브제로부터 거리를 둔 채 분리되고자하지만 그 움직임은 거듭 실패하고, 그 결과 오히려 몸과 오브제가 서로 얽혀들게 된다.
그에 반해 두 번째 <잠자>(2016)는 무대로 지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오브제 속에 사람이 들어가 오브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리고는 첫 번째 퍼포먼스에서처럼, 퍼포머는 오브제와 제 몸 사이에 간격을 내려고 몸부림치다가 누운 채로 움직임을 멈춘다. 마지막 장면은 양쪽에서 나온 두 사람이 오브제로부터 퍼포머를 구출하는 장면이다. 조금씩 인위적인 터치가 가해지면서 극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두 번째 <잠자>는 숲이라는 배경을 무대 공간 삼음으로써 무대와 객석을 분리했다는 점, 오브제 스스로 크기를 다변화하는 장면과 오브제 속의 사람과 오브제의 난투극, 그리고 외부적인 힘으로 오브제 속 사람이 구출되는 장면 등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극의 흐름을 이룬다는 점에서 조금 더 이야기의 구조가 선명해지면서 극의 형식에 가까워졌다.
작가는 <나성>시리즈부터는 무대 세트를 마련하고, 퍼포먼스 내에서는 이야기를 하며 오브제를 다루는 자로 분한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업 <나성LA-sung>(2016)은 높낮이가 다른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제 몸만한 무대를 배경으로, 병뚜껑이나 조약돌 크기의 작은 오브제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작가가 LA와 가족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나무판은 지면을 상징하기도, LA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이고, 위치를 이동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퍼포머의 몸짓은 서울과 LA, 엄마와 아빠로 상징되는 장소의 이동을 떠오르게 한다.
이 시리즈의 후속 작업, <피아노>(2016)와 <삼만불>(2017)과 <로망스>(2017)를 거치면서 오브제(무대장치)와 이야기의 조응관계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작가의 작업을 정리해 보는 데 유의미해 보인다. <피아노>는 목재로 구성한 구조물을 맴돌며 유년시절의 기억의 편린을 엮은 작업이다. 이 구조물은 집처럼 보이기도하고, 피아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이야기에서 ‘피아노 아래’ 공간이 두 번 등장하는데, 이곳은 깨진 컵의 파편이 깊숙이 튀어 들어간 곳이기도 하고, 무서운 꿈을 꾼 어린 날의 화자가 숨어들어간 공간이기도 하다. 공포와 안식을 동시에 주는 공간이다. 퍼포먼스의 마무리 장면에서 한 명의 퍼포머가 나무 구조물 아래 눕는데, 이 장면은 집처럼 보였던 구조물을 피아노로 변신하게 하는 연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무서운 꿈에 나온 괴물을 이야기할 때 끈 달린 목각 오브제를 흔드는 것이나, 막연한 장면에서 움푹한 사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 등은 실질적인 사물이나 감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작업보다 구체적인 편이다. <삼만불>은 가장 확장된 무대 구성을 보여주는데, 무대에 오브제들은 사물 이전의 상태, 즉 물성 혹은 재료의 수준으로 놓여있다. 손바닥보다 작은 석분토에 철사나 나뭇가지들을 얹어 세운다든가, 철골 지지대에 한쪽을 고정해 얹어놓은 널빤지의 반대쪽 끝을 이마에 아슬아슬하게 맞대고 반절하듯 자세를 낮춘다든가, 경첩으로 이은 나무판을 벽에 기대 세워놓으려 하는 퍼포머의 몸짓은 3백, 3천, 3만으로 확장되는 빚과 관련된 숫자로 이루어진 자전적인 이야기와 어우러지면서, 직립 또는 자립을 향한 노력과 물성에 따른 붕괴의 맞물림 속에 실패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로망스>는 가장 최근의 작업이다. 간신히 직립해 있는 목각 구조물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목재 공간과 바닥의 파란 호스만으로 이루어진 양쪽 공간이 일렬로 배열된 다섯 개의 무대배경이다. 퍼포머는 이 일렬의 무대 혹은 경계를 오가며 조금 더 절제되면서도 안무처럼 보이는 움직임을 선보이고, 이야기는 기억 속 하나하나의 장면에 대한 서술에 집중되어 있는 듯 보이면서도 단어 수준으로 분절되곤 한다. 다리를 뻗으며 자세를 낮추어 바닥에 있는 오브제를 집는다든가, 목각 공간에 몸을 맞추어 앉는다든가, 바닥에 눕는 등의 행위는 몸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오브제 자체와의 관련을 높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성>시리즈는 작가 스스로 갈음하듯, 오브제와 신체와 이야기가 맞물리는 퍼포먼스 이며, 이야기는 대부분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자전적인 경험은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자신의 성장과정과 경험,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의 뼈대를 구축해 본 이후에 다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면, 한층 풍요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노혜리의 퍼포먼스를 하나의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연극은 몸과 오브제, 이야기라는 세 가지 캐릭터가 서로를 부딪히는 가운데 생성되는 이야기이다. 몸과 오브제가 서로의 연계성을 높여가듯이, 이야기에게도 그들과 점차 연계성을 높여가는 길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만약 그러한 방향으로 이후의 작업이 진행된다면, 작가의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관람하는 이들도 몸과 오브제와 이야기가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파악해 보는 하나의 게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